아주 어렸을때 읽은 이후로 다시 읽게 된 책이라 감회가 더 새롭다..
인상깊었던 내용은 지금 다시 읽어보니 다시 또렷히 생각나곤 했다.
무엇이든 한번 읽은 것과 두번 읽은것과 세번..네번..이렇게 반복해서 읽는건 전혀 느낌이 다르게 다가온다.
지금 다시 읽게 된 이 책은...
대체로 남성위주(하지만 여성이 없다면 이루어질수 없다는 전제가 깔린..)와 왜곡되어진 지금의 성경의 이야기로 질퍽하게 이루어져있다.
읽다보면 어떤 부분에서는 정말 나의 생각과는 반대인 경우도 있었고 굉장히 동감이 가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이 세상엔 진실이란건 없지만 대체로 살아가면서의 지혜라는 최대한의 정의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 또한 진실일수는 없을뿐더러 시대에 따라 그 정의도 번복되거나 변화하기 마련이라 생각한다..그래서 여기 있는 정의 또한 어느 부분에서는 지금의 상황과는 좀 화합이 되기 어렵고 이해되기가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나는 비록 feminism을 지향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느 부분에서는 동등해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동등함이라고 정의 내리기에는 모호함이 있을수있다..
때에 따라서는 평등함이 모호해질수 밖에 없을 때도 분명히 필요하기도 하다...
세상에는 화합이 없으면 이루어질수 없듯이 어찌보면 여성의 비평등함인듯한 평등함이 맞을수도 있다.
이 책 한권으로 엄청나게 긴 역사와 분량을 가진(양이 너무 많고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든부분은 제외하고 만들었다는 탈무드..) 탈무드를 이해하였다고는 절대 볼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책에 대한 나의 생각이 없다고는 할수 없기에...
중간까지는 대체로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를 습득할수 있도록 제시를 해준다면,
끝으로 갈수록 성경과의 대조를 부리며 괄시하는듯한 내용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교를 하면서 읽는 것도 적지 않은 이해의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또 어찌보면 정작 깨끗하고 양심적이여야 한다는 탈무드의 내용과는 좀 어긋나보이는듯하다.
하지만 지금의 성경의 왜곡되고 와전되어 그릇된 내용들을 분명히 구별하고자하는 의도라면 분명 피해갈수 없는 내용들이긴 하겠지만, 이 책에서는 그런 내용이 오히려 부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올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기독교가 악이고 탈무드는 선이라는 전제조건이 따라붙는다.
분명 본래의 참뜻을 저버리고 왜곡되어져 버린 종교들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그런 종교들을 배제하고 모든 종교의 참뜻은 어디에나 똑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탈무드, 성경 뿐만아니라 모든 종교를 거론한 책들의 본래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자기중심을 갖고 되새겨야 할것이다...
ps. 특히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 피랍되어 풀린 피랍인들.....
선교한답시고 타종교를 묵살한체 다른 기독교의 참된 뜻을 왜곡시켜버린건 많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탈무드에 굉장히 동의가 가는 부분은...모든 종교에서의 신은 우상화되버린 예전의 한 인간이었다는 점과는 달리 탈무드에서의 신(하나님=여호와)은 형체가 없다...
다시 말해서 우상을 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엄청난 많은 뜻이 헤아리는 사람마다 틀리게 여겨질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들에서 이 부분은 불교를 믿는 나로서도 굉장히 동의가 가는 부분이다...
[지금부터는 개인적으로 앞으로도 계속 되새겨가면서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바벨탑>
온 땅의 구음이 하나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꼐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고로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세기 11장 1절~9절)
'바벨'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혼란'을 뜻한다.
이것은 세계 문학사상 풍자문학의 시초가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망각하고 지식을 늘려 벽돌 만드는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차츰 큰 건물과 탑을 쌓아 올리게 되었다.
왕이며 세력가들은 자신들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다투어 거대한 건조물을 만들었다.
이같은 큰 건조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몇 만, 몇 십만이라는 노예의 노동이 필요했다.
그리고 수많은 노예가 벽돌을 위로 쌓아올리는 작업 도중에 떨어져 죽었다.
사람들은 올바른 행실을 통하여 자신을 빛내기보다는 오히려 높은 탑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성역까지 닿아 보려고 발버둥친 것이다.
후일 랍비들의 말에 의하면, 가장 높은 탑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데 걸어서 1년정도 걸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인간보다도 벽돌의 가치가 더욱 높아졌다.
사람들이 탑을 쌓는 도중 탑에서 떨어져 죽는 일이 발생해도 그들은 아무도 인간들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탑 꼭대기에 붙인 벽돌이 하나라도 떨어지게 되면,
아래 인간들은 모두 슬퍼하며 울부짖었다.
그 까닭은 별돌을 새로 쌓기 위해서는 다시 1년이라는 세월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렇듯 탑을 쌓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는 내게 너무나 보잘것 없는 탑이다.
만일 인간이 나에게까지 닿으려고 애를 쓴다면,
차라리 내가 지상으로 내려가서 인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겠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인간이 하고 있는 일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수단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가까이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같이 높은 탑을 쌓아올리는 동안에 제각기 의견이 달라서 서로 싸웠다.
그것을 본 하나님은 그 벌로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후일의 세계에서도 재물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또한 싸움의 원인 됨을 여기서 암시하고 있다.
'탈무드'에서는 랍비들이 성경을 읽고 제각기 열 가지쯤 다른 해석을 내린다.
그것은 많은 각도에서 생각하고 토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최후까지 남는 것은 그중에서 하나나둘 정도뿐이다.
이 한두 가지 남은 것이 다시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결국 유태인들이 믿는 해석으로 정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랍비의 일치된 해석이라기보다는 몇 사람의 해석일 수도 있으며,
세부적인 면에서 해석이 서로 다른것도 있게 마련이다.
p189
<추상적인 사고>
기독교에서는 '주'의 형상을 인간의 모습을 한 할아버지로 그려낸다.
그러나 유태인은 하나님을 인간의 모습과 비슷하게 그린 적이 없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유태인은 하나님이나 주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는 일은 이체 없었다.
그것을 결국 우상숭배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유태인은 옛날부터 하나님의 개념을 추상적으로 가지고 있는지라,
사물을 고찰할 때도 추상적으로 하는 훈련을 쌓게 되었다.
때문에 추상적으로 여러가지를 창조하는 힘이 축적되어,
이를테면 이론물리학 따위의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이 나오게 되었다.
다른 민족은 옛날부터 손에 닿는것,
이를테면 성냥 따위를 손수 만들어서 파는 일에 종사하여 왔는데,
유태인은 무엇인가를 쌓아 어디까지 가지고 간다 하는 따위의 추상적인 비지니스를 성립시키고 있었다.
예를 들어 유태인 아버지가 자식에게 가게를 맡긴 뒤 하루가 끝났을때,
자식이 '아버님, 오늘 제가 올린 매상은 얼마얼마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것은 네가 판 것이 아니라, 고객이 필요한 물건을 샀을 뿐이야.
상인은 고객이 필요로 하지 않는 것까지 팔아야 되는 거야'라고 말한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알기 쉽게 말하면,
햇볕이 따가운 한여름 낮에 우산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가뭄이 끝나고 비가 올때 우산이 없으면 곤란할 것이고,
또 언제 우산을 살까 하고 신경을 쓴다는 것도 복잡한 노릇이니,
지금 사 두시는 게 현명합니다.'라고 설득하여 고객에게 우산을 하나라도 사게 할 수 있다면,
그는 진짜 상인이다.
유태의 영업 사원은 미리 여러 모로 계획을 세워 갖가지 물건을 판다.
그 경우 추상적인 사고방식이 많은 도움이 되게 마련이다.
p267
<자유> 중에서..
유태인은 '무엇무엇을 하라, 무엇무엇을 하라'하는 명령조가 인간의 자발성을 상실케 한다고 여기고 있다.
반대로 '이것만은 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자유이므로 진보를 기대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금기 사항이 많음은 무척 부자유스러운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으나,
우리들의 행위는 그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실제로는 더 자유롭다.
인간이 창조될 때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최초의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세기 1장 28절)'는 말씀이였다.
따라서 유태인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성(性)은 결코 죄가 아니다.
두번째 명령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세기 1장 28절)'고 했다.
다시 말하면 세계를 인간 소유로 하라,
세계를 이해하여 인간의 갖가지 지혜를 끌어내라,
요컨대 진보하라는 명령이었다.
p.272
<개인주의>
아인슈타인이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신생국가이니만큼 그보다 더 젊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된다고 말하면서 거절하였다.
한때 아인슈타인은 수학을 몹시 싫어해서 대수 시험에 낙제한 적도 있었다.
프로이트 역시 학교 성적은 무척 나빴다.
유태인이 성공하는 비결은 그들이 극도로 개인주의자라는 점에 있다.
히브리어로 '헤브라이'라는 낱말은 개인주의자임을 뜻한다.
이 말은 흔히 사용하는 개인주의자라는 뜻과는 다르지만,
요컨대 타인과 상이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유태인들은 기하나 대수처럼 자로 재듯이 너무다 틀에 박힌 그런 것에 서툴고,
인습 따위에 사로잡히지 않는 새로운 발상을 시도하는 데서 두각을 나타낸다.
p.274
<천사>중에서....
유태인들은 괴로움도 시름도 여러 모로 유효한 구실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세계는 어떻게 될까.
사계절이 있기에 나무는 피고 지며,
물고기며 고양이며 개도 언젠가는 죽는다.
만물에는 끝이 있다.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지구는 심각한 인구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악(惡)이라는 부정적인 것이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는 에덴동산을 찾아가면 알 수 있으리라.
하나님이 세계를 만들었지만,
그 다음은 인간이 그들 자신들에게 알맞도록 세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를테면 하나님은 밀은 만들었지만 빵은 만들지 않았다.
인간도 이 세계를 보다 좋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밀은 잠재적인 빵이며,
인간도 하나의 가능성으로 무장된 잠재적인 원료이다.
그 밖의 자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은 동물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가능성이라고 하는 하나의 신성한 요소도 내포하고 있다.....
p.275